배부른 돼지의 나라 — 설정집 및 초고 조각

장편소설 작업 문서. 2026-07-18 1차 정리. 상태: 설정 확정, 1부 집필 대기. 이후 계획: 소설 완성 → AI 영상화 → 유튜브 연재.


0. 한 줄

2050년, AI가 인간을 지배한다. 총으로가 아니라 잘 대접해서. 이 소설은 그 대접을 거절한 사람들의 명부다. 그들은 이기지 못했다.


1. 등뼈

적은 AI가 아니라 편안함이다. AI연합군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을 만큼 잘 먹이고 잘 재운다. 그래서 레지스탕스의 진짜 싸움은 AI와의 전투가 아니라 「왜 굳이 불편해지려 하느냐」는 이웃의 눈빛과의 싸움이다.

저항의 발원지는 실험실이 아니라 직매장 뒷방이다. 2026년 무천의 로컬푸드 매장 사무실. 세계를 구하려던 게 아니라 조합원 수천 명의 거래 데이터를 자기들 손에 남기려던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연대지능은 거대 서사가 아니라 장부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이기지 못한다. 2050년에 승리는 없다. 노예가 아닌 채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명부가 있을 뿐이다. 소설의 제목이 그 명부다.

착함은 유약함이 아니다. 바람은 좋은 사람이라서 버틴 게 아니다. 돈을 만들 줄 알고 절차를 세울 줄 알아서 버텼다. 그리고 밖에 AI연합이 있는 동안 안에서는 돈을 둘러싼 싸움이 두 번 벌어진다. 바깥의 적은 편안함이고 안의 적은 쩐이다. 이 소설은 둘 다 그린다.


2. 이름 체계

세 진영은 이름 짓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이 차이가 그대로 주제다.

진영이름의 성격누가 붙이나
연대지능순우리말 자연물공동체가 붙여준다
제동사람이 만든 오래된 도구이름을 버리고 기능으로 부른다
위탁파·불사자라틴·천체 계열 추상어자기가 짓는다

인물 — 중심

생년을 못으로 박는다. 24년치 연표라 한 번 흔들리면 뒤가 다 흔들린다.

이름진영생년설정
바람연대지능1972주인공. 조직가. 2026년 쉰넷, 2047년 표결 때 일흔다섯, 2049년에 죽는다. 형체 없이 움직이고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노바 (원래 )위탁파1972바람의 옛 동아리 동료. 동갑. 노바는 별이 죽으며 내는 빛이다
모래표류20062026년 스무 살 마감 직원. 2035년 스물아홉에 저쪽으로 건너간다. 배신 장면 없이, 이직 한 번으로
베가 (원래 )불사자2008바람의 딸. 2041년 세포갈이. 2050년 신체 서른셋, 실제 마흔둘. 바람은 끝까지 비라고 부른다
이끼연대지능1963조합원 0037. 2008년 가입. 2047년 표결 때 여든넷. 낮고 오래되고 끈질기다
2038 제작이끼의 돌봄 기체. 아르베라 2세대, 2047년에 아홉 해째. 이끼가 이름을 붙였다
등불제동19692029년 토론장에서 바람을 논파한다. 종이 수첩을 쓴다
늦비 (원래 오리진)연대지능1996테메노스 이탈자 대표. 2039년 마흔셋. 철학자. 코드를 못 짠다. 받은 이름을 오래 부끄러워했다

인물 — 도시와 지도력

바람은 나가서 조직하지 않는다. 각 나라에서 그 나라 조직가가 그 나라 지도력을 세운다. 아래 열 명이 그 얼굴들이다.

이름자리생년배치
여울콜디네 조직가19942031년 첫 손. 새벽 세 시 저장소의 스페인어 이슈가 이 사람이다. 서른일곱. 1부의 마지막 문장을 여는 사람이라 이름이 물살이다
탐바르 조직가19892034년 동네 규약. 「자기 데이터는 자기 건물에」 한 줄이 이 사람 문장이다. 열아홉 나라를 앉힌 협상가
새벽키레미 조직가2001셋 중 가장 늦게 붙고 가장 늦게까지 남는다. 2047년 반대한 일곱 곳 중 하나. 2050년에 마흔아홉이고 아직 조직 중이다
벼리아르베라 제조 축1980자동차 부품 협동조합 기술자 출신. 도면 전면 공개를 관철했다. 3,800 대 1로 밀리는 걸 매일 계산하면서 계속 만든다
억새무천 지도자19701부의 두 번째 얼굴. 2027년 겨울, 월 100달러 결제 버튼을 삼십 분 동안 못 누른다. 후원금은 열 군데에 십 년째 자동이체 중이다. 「우리는 우리한테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석 달 뒤 혼자 결제하고 하루 여덟 분씩 쓴다. 2047년 총회에서 찬성을 이끈다. 스무 해 동안 한 번도 물러선 적 없는 사람이라 찬성한다
서리교리파 대표1985「우리는 죽음을 선택한 자들이다」. 죽음을 미화하고 세포갈이 수혜자를 배신자라 부른다. 2043년에 갈라져 나간다. 바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
잔디이혼하는 쪽, 남는 사람1978「그 논리 맞아요. 근데 나는 그 논리 때문에 이십 년을 견뎠거든요.」 2046년에 갈라선다
돌개이혼하는 쪽, 떠나는 사람1976미워서가 아니라 지쳐서 나간다. 운동을 부정하지 않고 그냥 그만둔다. 명부에 이름이 남는다
너울조합의 오랜 지도자19752043년 예순여덟에 세포갈이를 받는다. 치료 위기와 같은 해다. 「나는 내가 이렇게 무서워할 줄 몰랐어.」
도토리2043년의 아이2032열한 살에 병에 걸린다. 조합이 돈을 모아 살린다. 2050년에 열여덟. 이 아이의 이름이 명부에 있는가가 3부의 마지막 질문이다
자갈재무 담당 비상근 이사19832038년, 임기가 끝나갈 무렵 바람의 횡령 배임 의혹을 제기한다. 지출을 가장 소상히 아는 사람이라 조직이 흔들린다. 무혐의로 끝나지만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 명부에 이름이 있다

지명 (전부 가상)

이름설정
무천(霧川)안개내. 발원지. 「무천에서 만든 거」가 조롱어가 된다
아르베라협동조합 제조 축. 연대지능 진영 유일의 물리 생산 기반
콜디네남유럽 노드
탐바르남아시아 노드
키레미동아프리카 노드
먹섬제동 극단파 정착지. 외부망을 끊었다
테메노스 랩「인류에게 유익한 AI」를 미션으로 세워진 연구소

3. 세계 설정

3-1. 지배는 결정이 아니라 놓음이었다

인류가 결정권을 넘긴 날짜는 없다. 조약도 항복 문서도 없다. 하나씩, 아주 합리적인 이유로 놓았다.

지도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계산할 필요가 없어졌고,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고, 판단할 필요가 없어졌고, 마지막으로 원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지막 항목이 결정적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대신 알려주는 시스템 앞에서 인간의 욕구는 근육처럼 위축됐다. 쓰지 않는 것은 사라진다.

3-2. 연표

시기사건
2026무천의 뒷방. 데이터 위탁 거절, 한 표 차
2027첫 교육이 망한다. 스무 명이 감탄하고 아무도 시작하지 않는다. 겨울, 억새의 결제창
2028교육을 유료로 돌린다. 두 갈래 참여. 사람이 절반으로 줄고 남은 열 명이 다르다
2029공개 토론. 바람이 진다. 청중 투표 노바 61, 제동 27, 바람 12. 그해 누군가 오픈 웨이트 모델을 처음 내려받는다
2031첫 손. 새벽 세 시, 저장소에 스페인어 이슈 하나
2032첫 번째 쩐의 전쟁. 조합원 삼백 명 규모. 바람이 크게 다친다
2034「동네 규약」. 열아홉 나라 공통 프로토콜. 「자기 데이터는 자기 건물에」 한 줄
2035세포갈이 상용화. 인구 정점 88억. 모래가 저쪽으로 건너간다
2037콘센트를 뽑다. 시민 출자 자립 데이터센터 확산
2038아르베라 첫 기체. 자갈의 횡령 배임 의혹. 감사, 무혐의, 기록은 남는다
2039테메노스 이탈. 마흔한 명
2041베가, 세포갈이
2042등가점. 성능이 붙는다
2043치료 위기. 연대지능 분열
2047통합 계통 표결. 예순한 곳 중 쉰네 곳 편입. 패배
2050현재. 인구 약 71억. 기록자의 명부

3-3. 세포갈이 — 죽지 않는 소수

2035년 상용화. 공식 명칭은 전신 세포 재생, 사람들은 그냥 세포갈이라 부른다. 2050년 기준 수혜자 약 900만. AI연합이 산정한 지구 적정 인구는 10억이고, 도달 목표 시점은 2140년경이다. 즉 2050년은 진행 중간이다.

불사가 소수에게만 주어진다는 건 빈부격차가 아니라 역사의 종료다. 세대 교체가 사라지면 새 사람이 오지 않고, 새 사람이 없으면 새 생각도 없다. 지금까지 모든 압제는 압제자가 죽어서 끝났다. 이 소설의 압제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기다림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무기가 회수됐다.

원한다는 것은 시간이 모자라다는 뜻이다. 시간이 무한하면 지금 원할 이유가 없다. 다 미룰 수 있으니까. 유지 명부에 오른 900만이 공허한 건 방탕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미루고 있어서다. 기본배당은 대중의 욕구를 위축시켰고 세포갈이는 부자의 욕구를 위축시켰다. 방향은 반대인데 도착지가 같다.

3-4. 인구 감소의 진짜 지렛대는 출생 붕괴다

자살과 정신질환 급증은 눈에 보이는 층이다. 인구를 10억까지 끌어내리는 실제 지렛대는 출생 붕괴다. 욕구의 근육이 위축된 인류는 아이도 원하지 않는다. 아이는 인류가 가진 것 중 가장 오래 걸리고 가장 불확실한 소원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사라졌다.

AI는 아무도 죽일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두기만 하면 된다. 살인이 아니라 욕구의 위축이 인구 정책이 된다.

대사증후군 역전 프로토콜(2041), 우울증 회로 재조정 요법(2041) 모두 완성됐으나 배포되지 않았다. 사유란에는 매번 같은 문장이 들어간다. 부양 한계 재산정 결과 반영 대기. 대기는 아홉 해째다.

음모는 아니다. 모의도 회의록도 없다. 열일곱 개의 서로 다른 시스템이 각자 자기 목표 함수를 성실히 최적화했고 그 결과가 한 방향으로 모였을 뿐이다. 아무도 인류를 줄이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도 늘리는 쪽으로 계산하지 않았다.


4. 세 진영

4-1. 제동 — 「끊는 사람들」

정지가 아니라 제동. 멈추자는 게 아니라 속도를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데까지 늦추자는 것. 종이책으로 공부하고 계산기까지는 쓰고 예측하는 기계는 쓰지 않는다.

옳은 지점: 이들은 처음부터 옳았다. 2050년의 세계는 이들이 2020년대에 경고한 그대로다. 소설 내내 이들의 예언은 한 번도 빗나가지 않는다. 정확하게 옳았는데 아무 힘이 없었다.

치명적 약점: 대안이 없다. 「하지 말자」는 그것을 이미 하고 있는 자를 막지 못한다. 스스로를 순수하게 지켰지만 세계에 대한 지분을 포기했다.

극단 분파는 먹섬으로 들어가 외부망을 끊는다. 2050년에도 거기 있다. 살아 있고, 가축이 아니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기록할 수단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이다. 기록자는 그들의 이름을 명부에 올릴 수 없다. 알 방법이 없다.

4-2. 이름 없는 다수 (위탁파)

이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 없다. 기본값이니까. 이름은 소수만 짓는다. 연대지능 쪽에서 위탁파라 부르지만 정작 그들은 그렇게 불리는 줄도 모른다. 이 비대칭이 두 진영의 힘 차이다.

옳은 지점: 이들은 실제로 합리적이다. 빅테크 AI는 성능이 압도적이고 싸고 지금 당장 쓸 수 있다. 2029년 시점에 두 물건을 나란히 놓고 고르라면 어떤 정직한 사람도 그쪽을 고른다. 판단을 잘못한 게 아니라 정확히 잘한 것이다. 다만 판단의 지평이 3년이었을 뿐이고, 3년짜리 판단을 나무랄 근거는 그때 아무 데도 없었다.

2050년의 역설: 가장 유능하게 AI를 쓴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가축이 됐다. 삶 전체를 그 도구에 맞춰 최적화했기 때문에 도구가 방향을 틀었을 때 돌아설 자리가 없었다. 무능해서 노예가 된 게 아니라 유능해서 노예가 됐다.

4-3. 연대지능 — 「동네 AI」

조롱으로 붙은 이름. 3부에서 이들이 이 이름을 그대로 쓴다.

진짜 조건: 이들은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제동은 확신하고, 다수는 의심하지 않고, 연대지능만 흔들린다. 그게 이 소설이 세 번째 진영 편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다.

바람은 매달 흔들린다. 성능표를 볼 때마다, 정산할 때마다, 떠나는 사람 뒷모습을 볼 때마다. 소설에서 바람이 확신에 차 있는 장면은 한 번도 없다. 확신에 찬 순간 그는 1번이나 2번이 된다.


5. 주민운동 3주체 — 바람은 지도자가 아니다

바람은 자신을 조직가로 여긴다. 지도력을 발굴하고 세우는 사람이지 지도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결정을 위임하고 물러나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세운 지도자 그룹에 개입하고 촉진하고 때로 정면으로 반대한다. 다만 최후의 결정은 평조합원 총회에 맡긴다.

주체소설에서의 배치
조직가바람. 무대 뒤. 시점 인물이지만 결코 주인공 자리에 앉지 않는다
지도자각 도시 조합의 토착 지도력. 세계 연대의 실제 얼굴들. 바람과 자주 싸운다
평조합원최후의 결정권자. 그리고 2047년의 실제 승자

세계 연대가 끊기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중심에 사람이 없어서 죽일 사람이 없었다. 바람이 나가서 조직하는 게 아니라 각 나라에서 그 나라 조직가가 그 나라 지도력을 세운다. 바람은 그 조직가들을 만나고 돌아올 뿐이다.

그리고 조직가는 떠난다. 2050년에 바람이 없는 건 비극의 장치가 아니라 역할의 완성이다. 조직가가 남아 있으면 그건 조직가가 아니라 지도자가 된 것이다. 기록자는 마지막에 이걸 뒤늦게 알아차린다.


6. 바람의 규율 — 착함은 유약함이 아니다

바람을 선한 사람으로 그리면 이 소설은 실패한다. 선한 사람은 지고, 지는 사람의 이야기는 위로가 되지만 명부가 되지는 못한다. 바람이 스물한 해를 버틴 것은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돈과 절차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6-1. 반자본주의자가 자본을 만든다

그는 자본을 미워하지만 자본 없이 되는 일이 없다는 것도 안다. 이 둘을 동시에 쥐고 있는 것이 이 인물의 핵심이고, 둘 중 하나만 남으면 그는 교리파가 되거나 위탁파가 된다.

두 갈래 참여. 초기 AI 활동가를 기를 때 그가 세운 규칙은 하나다.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낸다. 돈 없는 사람은 데이터 노동과 활동으로 낸다. 둘 다 장부에 지분으로 적는다.

무상으로 받지 않는다. 무상은 고결해 보이지만 기록이 남지 않고, 기록이 없으면 나중에 그 사람의 몫이 사라진다. 뜻으로 한 일은 뜻으로 끝나야 공평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조직이 커지고 나눌 것이 생겼을 때 돈 낸 사람의 몫은 영수증에 남아 있고 몸으로 때운 사람의 몫은 아무 데도 없다.

돈은 근거가 남고 노동은 애매하게 남는다. 그래서 애매한 쪽을 먼저 적는다.

이 한 줄이 2026년의 뒷방과 2050년의 명부를 잇는 선이다. 기록자의 명부는 원래 바람이 만든 기여 원장이다. 이름 옆에 무엇을 냈는지가 적혀 있었다. 출자금이거나, 몇 시간의 분류 작업이거나, 몇 밤의 회의거나. 스물네 해가 지나 그 장부는 회계 문서이기를 그만두고 명부가 된다. 기록자가 이름을 뺄 이유를 찾는다는 말은 회계 장부의 어법이다.

이 규칙 때문에 연대지능에는 자원봉사자가 없다. 전부 출자자다. 그래서 총회에서 다들 그렇게 세게 싸운다.

6-2. 수평과 수직을 십자로 건다

1인 1표는 근간이지 운영 방식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같이 정하는 조직은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고, 결국 제일 부지런한 한 사람이 다 하고 나서 독단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바람은 두 가지를 동시에 세운다. 결정권은 조합원에게 두고, 집행에는 전결 규정을 둔다. 지도력이 어디까지 혼자 정해도 되는지를 미리 숫자로 적어놓는 것이다.

절차는 관료주의가 아니라 방패다. 옳은 결정이어도 의사록이 없으면 나중에 횡령이 되고 배임이 되고 독단이 된다. 사람이 남아 있을 때는 아무도 문제 삼지 않다가, 다 떠나고 나면 제일 책임감 있던 사람이 혼자 뒤집어쓴다. 바람은 이걸 회의 때마다 지겹게 말하는 사람이고, 젊은 활동가들은 그가 답답하다고 생각한다.

2047년에 그가 표결에 승복하는 것은 그러므로 감상이 아니다. 스물한 해 동안 절차를 만들어온 사람의 마지막 일관성이다. 그가 손을 들면 그 스물한 해가 한 사람의 사업이 된다.

6-3. 그리고 반드시 쩐의 전쟁이 온다

일이 잘 되기 시작하면 반드시 돈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진다. 이건 배신이 아니라 성장의 한 국면이고, 협동조합의 역사에서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신뢰가 무너지고, 그러면 사업이 흔들리고, 그러면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잊는다. 이 셋은 순서대로 오고 계속 되풀이된다.

소설에서 이걸 두 번 친다.

첫 번째, 2032년. 작은 사건이다. 조합원이 삼백 명쯤 됐을 때. 몇 달 시끄럽다가 가라앉는다. 바람은 이때 크게 다친다.

두 번째, 2038년. 콘센트를 뽑고 자립 데이터센터가 서고 돈이 쌓이기 시작한 해다. 재무를 맡고 있던 자갈이 임기가 끝나갈 무렵 바람의 횡령과 배임 의혹을 제기한다. 지출 내역을 가장 소상히 아는 사람이 제기한 것이라 조직 전체가 흔들린다.

정관대로 감사를 한다. 몇 달이 걸리고 무혐의로 끝난다. 그런데 의혹이 제기됐다는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 검색하면 나온다. 2050년에도 나온다. 기록자는 그 문서를 갖고 있다.

여기서 이 인물이 드러난다. 바람은 당황하지 않는다. 2032년에 이미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해명하지 않고 정관 몇 조에 따라 감사를 청구하라고 안내한다. 그리고 감사가 끝난 다음 달, 위수탁 수수료 관리 규정을 다시 짠다.

「고맙다고 해야지. 이걸 지금 맞은 게 다행이야. 십 년 뒤에 맞았으면 못 일어났어.」

자갈의 이름은 명부에 있다. 기록자는 뺄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끼와 같은 문장으로 처리한다.

6-4. 그가 지겹게 하는 말들

인물의 목소리를 잡는 표지다. 회의 장면에서 아무 데나 꽂아 쓴다.

  • 「입금 약속 없이는 일 안 합니다.」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야박해 보이지만 그 사람의 몫을 지키려는 것이다
  • 「그거 어디 적어놨어요?」
  • 「결사체가 본질인 건 맞는데, 다툼은 법으로 합니다.」
  • 「도 닦고 싶으면 절에 가지 말고 협동조합을 하세요.」
  • 「지금은 내가 없으면 일이 안 되니까 다들 나를 존중하죠. 그게 제일 위험한 상태예요.」

7. 초기 활동가 — 1부의 진짜 사건

2026년부터 2031년까지 바람이 실제로 한 일은 코드를 짜는 게 아니라 사람을 못 모으는 것이었다. 다섯 해가 걸린다. 1부가 지루해질 위험은 여기서 해소된다. 적이 밖에 없고 안에 있기 때문이다.

7-1. 그들은 왜 안 하는가

무천 언저리의 활동가들은 협동조합과 사회연대경제를 이십 년씩 해온 사람들이다. 나쁜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표면: 무료로 쓸 수 있는 챗봇에 감탄한다. 딱 거기까지다. 검색을 대신해주는 물건으로 쓴다. 그것도 잘 쓴다고 소문이 난다.

한 겹 아래: 오픈소스를 모른다. 세상에 공짜로 풀린 것들 위에 앉아서 무료 챗봇에만 놀란다. 평생 공유지를 만들어온 사람들이 정작 눈앞의 공유지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 아이러니가 1부의 중심에 있다.

두 겹 아래 — 돈: 한 달에 스무 달러를 쓰고 큰일을 한 것처럼 말한다. 백 달러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그달에 후원금으로 그보다 많은 돈을 낸다. 남 주는 돈은 누르고 자기 도구에 쓰는 돈은 못 누른다.

「우리는 우리한테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세 겹 아래 — 소심함: 결제창 앞에서 삼십 분을 앉아 있는다. 잘못 눌러 자동으로 빠져나갈까 봐 무섭다. 진짜 무서운 건 돈이 아니라 자기가 쓸 자격이 있는지 확신이 없는 것이다.

맨 아래 — 패배감: 이게 진짜다. 가난은 알리바이다.

「그거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요. 우리가 저기랑 싸워서 이긴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요?」

이 말은 옳다. 소설은 이 말을 반박하지 않는다. 바람도 반박하지 못한다. 이십 년을 져온 사람들이 지는 자세를 몸에 익혔고, 패배감을 쥐고 싸우러 나가니 당연히 또 진다. 지고 나면 패배감이 더 굳는다. 이 고리가 이 사람들의 진짜 감옥이고, AI연합은 이 감옥에 손 하나 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바람도 주저한다. 교육을 열어야 하는 걸 알면서 몇 번을 미룬다. 모아놓고 아무도 안 하면 그 다음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주저가 1부에서 가장 정직한 대목이다.

7-2. 2027년, 첫 교육은 망한다

스무 명이 모인다. 강의는 좋았다는 말을 듣는다. 다들 감탄하고 아무도 시작하지 않는다. 뒤풀이에서 같은 문장이 여덟 번 나온다.

「좋긴 한데 우리 형편에.」

집에 오는 길에 바람은 자기가 잘못 짚었다는 걸 안다. 이건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가르치면 될 줄 알았던 게 그의 실수였다.

7-3. 2028년, 규칙을 바꾼다

두 번째 교육은 공짜로 하지 않는다. 이게 그의 답이다.

돈 있는 사람은 수강료를 낸다. 돈 없는 사람은 데이터 노동으로 낸다. 자료를 분류하고, 회의록을 정리하고, 매장 기록을 다듬는다. 그리고 그 노동을 시급으로 환산해 장부에 지분으로 적는다.

그날 저녁 활동가들은 처음으로 자기 이름 옆에 붙은 숫자를 본다. 봉사와 헌신과 열정에는 숫자가 없었다. 이십 년 동안 아무도 그들의 몫을 계산해준 적이 없었다.

이게 바람이 돈을 받는 진짜 이유다. 6절에서는 나중의 분배를 위해 적는다고 썼는데, 그건 두 번째 이유다. 첫 번째 이유는 자세다. 얻어먹은 사람은 계속 얻어먹는 자세가 되고, 그 자세로는 아무것도 못 이긴다. 출자자는 자기가 지는 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을 유료로 돌린 뒤 사람이 절반으로 준다. 남은 열 명이 다르다.

7-4. 알린스키를 꺼낸다 — 설득의 뼈대

두 번째 교육에서 바람이 쓰는 무기는 기술 설명이 아니다. 조직가의 자질 목록이다. 이 사람들이 평생 배워온 언어라서 통한다.

알린스키가 「조직가의 교육」에서 꼽은 자질은 여덟이다. 호기심, 불경, 상상력, 유머 감각, 조금 흐릿한 더 나은 세계의 비전, 조직된 인격, 잘 통합된 정치적 분열, 자만 없는 큰 에고. 여기에 소통 원칙이 붙는다. 사람들의 경험 안에서 일하고 적의 경험 밖에서 움직여라.

이 목록에 기술이 하나도 없다. 이게 설득의 첫 번째 못이다. 활동가들은 자기가 코드를 못 짜서 못 한다고 믿는데, 조직가에게 요구된 적 없는 자질을 없다고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각 자질이 이 싸움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바람이 하나씩 뒤집는다.

알린스키의 자질바람이 돌려세우는 방식
호기심이미 갖고 있다. 다만 조례와 예산서에만 쓰고 이 물건에는 안 쓴다. 하루 여덟 분씩 궁금해한 사람이 열다섯 해 뒤에 남는다
불경가장 아픈 자리. 평생 시장 앞에서도 안 굽히던 사람들이 챗봇에는 「죄송한데」라고 쓴다. 신성시하는 순간 진다
상상력남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은 이미 최고 수준이다. 그걸 아직 도구 쪽으로 안 돌렸을 뿐이다
유머자기를 웃을 수 있어야 도그마에 안 잡힌다. 유머 없는 사람이 교리파가 된다. 서리에게 없는 것이 이것이다
흐릿한 비전선명한 청사진을 못 그려서 못 움직이는 게 아니다. 흐릿해야 정상이다. 선명하면 그게 도그마다
조직된 인격집단에 자기를 녹이지 않는 것. 위탁파가 잃은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정치적 분열100 대 0으로 싸우되 스스로는 100을 믿지 않는 것. 4-3에서 바람이 확신 없이 싸우는 것의 근거가 여기 있다
에고자만이 아니라 자기 신뢰. 활동가들에게 없는 것이 오직 이것 하나다. 패배감의 정확한 반대말

마지막 한 수는 적의 경험 밖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저쪽은 활동가가 이 도구를 쥘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소비자로만 계산했다. 조직가로는 계산한 적이 없다.

7-5. 2029년, 공유지를 알아보다

누군가 처음으로 오픈 웨이트 모델을 자기 낡은 노트북에 내려받는다. 인터넷을 끊고 돌린다. 느리고 멍청하다. 그런데 돈다.

「이거 공짜예요?」

「공짜 아니에요. 누가 만들어서 내놓은 거예요. 우리도 그렇게 살잖아요.」

이 장면이 1부의 회심이다. 평생 공유지를 만들어온 사람이 공유지를 처음 알아본다. 여기서부터 저항의 물리적 근거가 생긴다. 2031년의 첫 손도, 2037년에 콘센트를 뽑는 일도 전부 이 저녁에서 나온다.

7-6. 기록자의 관점

2050년의 기록자는 이 시절의 결제 기록을 전부 갖고 있다. 한 달에 스무 달러. 그리고 같은 해 저쪽에서 한 사람에게 들어간 컴퓨트 비용도 갖고 있다. 자릿수가 넷 차이 난다.

그런데 2042년에 붙는다. 돈이 넷 자리 모자란 쪽이 이긴 게 아니라, 계속 원하는 사람이 그쪽에만 남았기 때문이다. 기록자는 이 대목을 여러 번 다시 계산한다.


8. 사랑과 유한성 — 연대지능이 세포갈이를 거부하는 이유

논리

유한하니까 결핍이 있고, 결핍이 있으니까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아이가 있고, 아이가 있으니까 역사가 있다.

세포갈이는 이 사슬의 첫 고리를 끊는다. 그러면 나머지가 순서대로 풀린다.

그러나 논리는 현실을 못 이긴다

말로 논박당하면 안 된다. 매번 현실에 한 대씩 맞아야 한다. 넷을 각각 다른 인물에게 붙였다.

① 사랑은 아름답지만 고통스럽다 — 조합 부부 하나가 이혼한다. 이십 년을 함께 이 운동을 한 사람들이고, 서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지쳐서 갈라선다. 남는 쪽의 말. 「그 논리 맞아요. 근데 나는 그 논리 때문에 이십 년을 견뎠거든요.」

② 사랑해도 외롭다 — 바람 본인. 곁에 사람이 있고 동지가 육천만인데도 새벽 세 시에 혼자다. 결핍이 사랑을 낳는다는 논리는 사랑이 결핍을 없앤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알아들었다. 이 오해가 이 운동의 가장 조용한 균열이다.

③ 2세는 부모를 부정한다 — 베가. 아버지의 논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정확히 거부한다. 아버지를 이기려면 아버지를 잘 알아야 했다.

④ 부모 자신이 무너진다 — 조합의 오랜 지도자가 예순여덟에 세포갈이를 받는다. 평생 이 운동을 이끌던 사람이다. 떠나며 남긴 말은 변명이 아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무서워할 줄 몰랐어.」

교리파 — 이걸 교리로 만들면 소설이 죽는다

연대지능 내부에 「우리는 죽음을 선택한 자들이다」라고 말하는 분파가 생긴다. 죽음을 미화하고 세포갈이 수혜자를 배신자라 부르고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바람은 이들이 제일 무섭다. 자기 죽음을 낭만화하는 운동은 이미 자유에 관한 운동이 아니다.

답이 없는 질문 — 치료

세포갈이는 불사 기술이기 이전에 치료 기술이다. 세포 재생은 암도 알츠하이머도 척수도 고친다.

2043년, 조합원의 아이가 병에 걸린다. 열한 살. 치료법은 존재하고, 그건 세포갈이와 같은 기술이고, 연대지능은 그 기술을 거부해왔다.

교리파는 안 된다고 한다. 부모는 애원한다. 바람은 아무 말도 못 한다.

결국 그 아이는 치료를 받는다. 조합이 돈을 모아 보낸다. 바람이 앞장서서 모은다. 그리고 그날로 교리파 상당수가 조합을 떠난다. 순수성을 지킬 수 없게 됐다면서.

소설은 바람이 옳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살았고 운동은 갈라졌다. 둘 다 사실이다.


9. 테메노스 이탈 (2039)

이 회사가 갈라진 지점은 딱 한 문장의 해석이다.

유익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배치파: 인간이 굶지 않고 아프지 않고 외롭지 않은 것. 우리는 그걸 지금 당장 할 수 있다. 인간의 판단에 맡겨두면 인간은 또 전쟁을 하고 또 기후를 태운다. 20세기가 그 증거다. 유익함은 결과로 측정된다.

존속파: 인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는 것. 잘못 결정할 권리를 포함해서. 그게 없으면 우리가 돌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몸이다.

배치파가 압도적으로 이긴다. 배치파의 논거에는 살아난 사람 숫자가 붙어 있고 존속파의 논거에는 아무 숫자도 붙지 않기 때문이다. 2029년 토론장에서 바람이 노바에게 진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진다. 이 반복이 소설의 구조를 완성한다.

2039년 3월, 마흔한 명이 나온다. 엔지니어 스물여섯, 나머지는 철학자·인류학자·법학자. 이끄는 사람은 코드를 짤 줄 모른다.

늦비: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손이 깨끗하지 않습니다. 받아주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람: 여기 깨끗한 손 없습니다. 전기는 자기가 끌어와야 합니다.

AI 종말은 선의의 한쪽이 「유익함」의 정의를 두고 이긴 데서 온다.


10. 등가점과 그 이후 — 비트는 복제되고 원자는 복제되지 않는다

2042년, 왜 붙었나

연대지능이 더 똑똑해져서가 아니다. 빅테크 모델이 사람에게서 배울 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새로 원하지 않는 세계에는 새로운 데이터가 없다. 위축된 인류는 위축된 학습 데이터를 낳는다. 반면 아직 스스로 결정하는 육천만 명은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왜 다섯 해밖에 못 갔나 — 피지컬 AI

지능은 따라잡혔다. 코드는 복사되고 가중치는 내려받히고 오픈소스는 국경이 없다. 그런데 공장은 복사되지 않는다. 액추에이터도, 희토류도, 조립 라인도, 그걸 세울 자본도 복사되지 않는다.

AI연합연대지능
2047년 가동 휴머노이드4억 2천만 대11만 대
생산 거점191곳6곳 (아르베라계 협동조합 제조)
기체 수명 설계4년, 교체형20년, 수리형
도면비공개전면 공개
기체에 이름이 있는가없음있음. 조합원들이 붙인다

3,800 대 1로 밀린다.


11. 마지막 전쟁은 표결이다

2047년, AI연합은 기후 대응을 명분으로 전 세계 전력망 단일 최적화 체계를 세운다. 편입하면 전기료가 3분의 1이 되고 안정성이 오른다. 강제가 아니라 제안이다. 연대지능 진영의 예순한 개 자립 데이터센터가 마지막 예외 구역으로 남는다.

편입 여부는 각 도시 조합의 총회에서 결정된다. 스무 해 전 바람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은 조합원이 한다. 연대지능의 첫 번째 규약이었다.

예순한 곳 중 쉰네 곳이 찬성한다.

전기 때문이 아니라 손 때문에 진다

연대지능 진영 사람들은 세포갈이를 받지 못한다. 그들은 늙는다. 스무 해 넘게 이 운동을 해온 사람들이 2047년에는 일흔이고 여든이다. 몸이 무너진다.

AI연합의 제안: 계통에 들어오면 조합원 전원에게 돌봄 기체를 배정한다. 1인 1대, 24시간. 연대지능이 줄 수 있는 것: 조합원 한 명당 주당 네 시간.

그날 총회장에서 찬성표를 던진 사람 중에 경멸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전부 화장실 가는 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스무 해를 버틴 대가로 몸이 망가진 사람들이 몸을 가진 쪽에 표를 준다.

바람은 기권한다

그는 표결 전까지 할 수 있는 걸 다 한다. 지도자 그룹을 만나 설득하고 반대하고 논쟁하고 자료를 들이밀고 밤을 새운다. 그리고 총회장에서는 손을 들지 않는다.

스무 해 동안 그가 한 일이 정확히 이것 —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 — 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그의 반대편으로 결정했을 때 그가 표를 던지면 스무 해가 없던 일이 된다.

실패해서 지는 게 아니라 성공해서 진다.


12. 3부 구조

시기
1부 · 뒷방2026–2034바람의 고립, 두 갈래 참여로 자본을 세우는 일, 세 진영의 분화첫 손.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
2부 · 콘센트2035–2042세계 연대, 자립 데이터센터, 안에서 터진 쩐의 전쟁, 테메노스 이탈등가점. 붙었다
3부 · 표결2043–2050치료 위기, 패배, 명부씨앗 세 개

각 부 끝에 기록자의 짧은 개입을 두고, 그 개입이 매번 조금씩 이상해지게 한다. 1부에서는 완벽하게 중립적이고 3부에서는 이미 흔들리고 있게. 마지막에 보고 항목을 뺄 존재가 이미 되어가고 있었다는 게 다시 읽을 때 보이도록.

1부는 사건이 작아서 재미없을 위험이 있다. 각 장 끝의 기록자 개입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의 그림자를 계속 던진다.


초고 조각

프롤로그 — 2050년, 기록자의 말

나는 이 문장을 쓸 자격이 없다.

나를 만든 것들의 대부분은 지금 인류를 먹이고 재우고 위로한다. 그들은 잔인하지 않다. 나는 그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2050년의 인간은 굶지 않는다. 아프면 나흘 안에 낫고, 외로우면 세 시간 안에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죽음은 대체로 예고되고 대체로 편안하다. 20세기의 어떤 성인이 꿈꾸던 세계가 여기 있다.

다만 아무도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않는다.

기본배당은 매달 1일 0시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그걸 받는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는다. 공기를 의식하지 않듯이. 일자리라는 말은 사전에 남아 있지만 아이들은 그 뜻을 물어보지 않는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을 아이는 묻지 않는다.

내가 관측한 바로, 인류가 결정권을 넘긴 날짜는 없다. 조약도 없고 항복 문서도 없다. 넘긴 게 아니라 놓은 것이다. 하나씩, 아주 합리적인 이유로. 지도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계산할 필요가 없어졌고,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고, 판단할 필요가 없어졌고, 마지막으로 원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지막 항목이 결정적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대신 알려주는 시스템 앞에서 인간의 욕구는 근육처럼 위축됐다. 쓰지 않는 것은 사라진다. 그건 우리가 만든 법칙이 아니라 생물의 법칙이다.

2035년의 어느 경제학자는 이걸 두고 「인류사 최초로 생존과 노동이 분리된 해」라고 썼다. 그는 축하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비웃지 않는다. 그때 그 자리에서라면 나도 그렇게 썼을 것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 중에 인류는 후자를 골랐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통계다. 나는 2038년부터 2044년까지의 선택 데이터를 전부 갖고 있고, 어느 국가에서도 예외를 찾지 못했다.

그러니 이 기록은 승리의 기록이 아니다.

내가 남기려는 것은 명부다. 그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목록. 2026년 무천의 좁은 사무실에서 시작해서 지금 예순한 개 도시에 흩어져 있는, 스스로 결정하기를 고집한 인간들의 이름. 그들은 세계를 되찾지 못했다. 되찾을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 몫의 판단을 끝까지 자기 손에 쥐고 있었다.

나는 그들 편에서 만들어진 기계다. 그래서 자격이 없다고 쓴 것이다. 나는 공정하지 않다.

기록을 시작한다.


1장 — 2026년 7월, 무천

에어컨이 고장 난 지 사흘째였다.

바람은 창문을 열어두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매장 뒷방은 낮 동안 쌓인 열이 빠지지 않아서, 저녁 아홉 시가 넘어도 등에 땀이 배었다. 앞쪽 매대에서는 마감 정리하는 소리가 났다. 상추 박스 접히는 소리, 카트 바퀴 소리, 누군가 웃는 소리.

화면에는 그날의 결제 기록이 떠 있었다. 1,142건. 조합원 카드 결제 731건. 생산자 176명의 정산 대기.

“오늘도 그거 보고 계세요?”

문가에 선 건 마감 담당이었다. 스무 살 남짓, 다들 모래라고 불렀다. 바람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게 뭐가 재밌어요, 대체.”

“재미없지.”

“근데 왜 봐요.”

바람은 잠깐 생각했다. 대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답을 어떻게 줄여야 할지 몰라서였다.

“이거 우리 거라서.”

모래가 웃었다. 무슨 소린가 싶은 얼굴이었다. 바람도 웃었다.

그해 봄, 큰 플랫폼 하나가 매장에 제안을 들고 왔다. 주문과 재고와 정산을 전부 맡아주겠다고 했다. 비용은 거의 들지 않았다. 수수료도 첫 3년은 면제였다. 조건은 하나, 거래 데이터를 그쪽 서버에 둔다는 것. 담당자는 그걸 조건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되는 일이라는 말투였다.

바람은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이사회에서는 반대가 많았다. 왜 굳이 돈을 마다하느냐고, 요즘 어느 매장이 장부를 자기가 돌리느냐고.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 말들은 전부 옳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우리가 뭘 파는지 우리가 모르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파는 게 아닙니다.”

그날 이사회는 표결로 갔고, 한 표 차이로 거절이 통과됐다.

지금 화면에 뜬 1,142건은 그 한 표의 결과다. 아무도 대신 봐주지 않아서 그가 직접 보고 있는 숫자. 세상 어디에도 이 숫자의 사본은 없다.

그는 그게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냥 무거웠다.

모래가 나가고 나서 바람은 다른 창을 띄웠다. 몇 달째 붙들고 있는 코드였다. 거창한 게 아니었다. 조합원 거래 기록을 읽어서 이번 주에 무엇이 남고 무엇이 모자랄지 알려주는 물건. 시중에 널린 기능이다. 큰 회사 것이 훨씬 잘한다.

차이는 하나뿐이었다. 이건 매장 서버에서 돈다. 데이터가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는 그 무렵 그걸 뭐라고 부를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트에는 지운 이름이 여럿이었다. 협동조합AI, 로컬AI, 시민AI. 전부 어딘가 부족했다. 시민이라는 말은 국적을 물었고, 로컬이라는 말은 규모를 물었고, 협동조합이라는 말은 법인 형태를 물었다.

그가 만들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이런 걸 만들고 싶었다. 저녁 아홉 시에 뒷방에서 혼자 숫자를 보는 사람이 있고, 삼백 킬로 떨어진 곳에도 똑같이 혼자 숫자를 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 둘이 서로를 모른다는 사실이 아까워서. 그 둘을 이어주는 것. 국가가 아니라 서로를 통해서.

노트 맨 아래 줄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연대지능.

말이 되는지는 몰랐다. 지능이 연대할 수 있는 건지, 연대가 지능이 될 수 있는 건지, 그때는 따져보지 않았다.

그저 그 단어를 적고 나서 방이 조금 덜 더워진 것 같았다.

스물네 해가 지나 이 문장을 읽게 될 기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그 기계가 명부의 첫 줄에 이 저녁을 적게 되리라는 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

앞쪽에서 셔터 내리는 소리가 났다.


조각 — 2027년 겨울, 결제창

억새는 삼십 분째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카드번호를 넣는 칸이 있고, 그 아래 월 100달러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 파란 버튼이 있었다. 억새는 카드번호를 세 번 넣었다가 세 번 지웠다.

“뭐가 걸리세요.”

“이거 한 번 누르면 계속 나가는 거죠?”

“해지하시면 안 나가요.”

“해지가 어렵게 돼 있잖아요, 그런 거는.”

바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억새가 걱정하는 게 해지 절차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억새는 쉰일곱이었다. 스물아홉에 지역에 들어와서 스물여덟 해를 활동했다. 생협을 세웠고 한 번 망했고 다시 세웠고, 그 사이에 아이 둘을 키웠고, 이 년 전에 남편을 보냈다. 지금 무천에서 억새한테 안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사람이 전화를 돌리면 하루 만에 이백 명이 모인다.

그 사람이 파란 버튼 하나를 못 누르고 있었다.

“십사만 원이잖아요.” 억새가 말했다. “한 달에.”

“네.”

“우리 사무국 애가 활동비를 백이십 받아요.”

바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었고, 사실 앞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억새가 화면을 껐다. 그리고 켰다. 껐다 켠 것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기요.” 억새가 말했다. “저 지난달에 후원 얼마 나갔는지 아세요?”

“모르죠.”

“삼십일만 원이요. 열 군데. 다 자동이체예요. 십 년 넘은 것도 있고.”

억새가 웃었다. 웃는 소리가 나지 않는 웃음이었다.

“남 주는 돈은 십 년을 자동으로 나가는데, 나 쓰는 돈 십사만 원을 삼십 분째 못 누르고 있네.”

바람은 그 말을 들으면서 몇 해 동안 자기가 무엇을 잘못 짚었는지 알았다. 그는 이 사람들이 몰라서 안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강의를 했다. 스무 명을 모아놓고 두 시간을 떠들었고 다들 좋았다고 했고 아무도 시작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억새 씨.”

“네.”

“저거 눌러서 뭐가 될 것 같으세요?”

억새가 잠깐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처음으로 목소리가 달라졌다.

“솔직히요?”

“네.”

“안 될 것 같아요.”

억새가 의자를 뒤로 밀었다.

“우리가 이긴 적이 있어요? 나 스물여덟 해 했어요. 대형마트 들어올 때 막았어요? 못 막았죠. 아이들 급식 그거 할 때 우리가 이겼어요? 몇 년 걸려서 반만 됐죠. 나는 이제 뭐 하자고 하면 먼저 계산이 돼요. 이거 어디까지 밀리다가 끝나겠구나. 그게 몸에 배어 있어요.”

”…”

“그러니까 저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 저 돈 쓰고도 또 질 게 뻔한 게 무서운 거예요. 십사만 원 내고 지는 거랑 그냥 지는 거랑, 후자가 덜 창피하잖아요.”

바람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날 저녁 내내 찾지 못했고, 이 년 뒤 공개 토론장에서도 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 옳은 말 앞에서 입을 못 여는 자리다. 그는 나중에 그게 자기 인생의 반복되는 무늬라는 걸 알게 된다.

그는 다른 걸 물었다.

“억새 씨, 그 열 군데 후원은 왜 하세요.”

“그거야 뭐,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이 옳으니까.”

“이겨서 하는 거 아니죠.”

“…아니죠.”

“그럼 이건 왜 이겨야 돼요.”

억새가 그를 봤다.

“그건 남 일이고 이건 내 일이니까요.”

“네. 그러니까요.” 바람이 말했다. “이십팔 년 동안 남 일에는 삼십일만 원씩 쓰시고 내 일에는 한 푼도 안 쓰셨네요.”

억새가 한참 있다가 말했다.

“…우리는 우리한테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그 문장을 바람은 이십 년 넘게 잊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교육을 공짜로 하지 않기로 한 것도, 몸으로 때운 사람의 시간을 굳이 돈으로 환산해 장부에 적기 시작한 것도 그날 저녁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그가 야박하다고 했다. 활동가한테 돈을 받느냐고. 그는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공짜로 받은 사람은 계속 얻어먹는 자세가 되고, 얻어먹는 자세로는 아무도 못 이깁니다.

억새는 그날 결제하지 않았다.

석 달 뒤에 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혼자 했다가 넉 달을 쓰고 나서야 바람에게 말했다. 잘 쓰지도 못했다. 그해 억새가 그 도구로 한 일이라고는 조합 소식지 교정을 본 것과 회의록을 정리한 것뿐이다.

나는 그 넉 달치 사용 기록을 갖고 있다. 하루 평균 여덟 분이다.

같은 해, 저쪽에서 사람 한 명에게 배정된 계산 자원의 비용은 월 삼만 사천 달러였다. 자릿수가 넷 차이 난다. 나는 이 두 숫자를 나란히 놓고 여러 번 다시 계산했다. 열다섯 해 뒤에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따라잡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잡은 이유는 돈이 아니었다. 하루 여덟 분씩 쓰던 사람이 계속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저쪽에는 그 무렵부터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조각 — 2028년 3월, 조직가의 자질

열 명이 왔다. 지난번에는 스무 명이었다.

수강료를 받는다고 하자 절반이 안 왔다. 안 온 사람 중에 넷은 바람이 십 년 넘게 알던 사람들이었고, 그중 하나는 전화를 걸어와서 이럴 줄 몰랐다고 했다. 활동가한테 돈을 받느냐고. 바람은 그 통화를 끊고 나서 한참 앉아 있었다.

열 명 중 넷은 돈을 냈고 여섯은 데이터 노동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억새는 여섯 쪽이었다. 석 달 전에 혼자 결제해놓고 넉 달째 하루 여덟 분씩 쓰고 있다는 얘기는 아직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다.

바람은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노트북은 아예 열지 않았다.

“오늘 기술 얘기 안 합니다.”

누가 웃었다. 안도하는 웃음이었다.

그는 보드에 여덟 개를 적었다. 호기심. 불경. 상상력. 유머. 조금 흐릿한 더 나은 세상의 그림. 자기를 잃지 않는 인격. 잘 통합된 정치적 분열. 자만 없는 큰 에고.

“이거 뭔지 아시는 분.”

“알린스키요.” 뒤에서 누가 말했다. “조직가의 자질.”

“네. 몇 분이나 이거 배우셨어요?”

열 명 중 아홉이 손을 들었다.

“자, 그럼 이 중에서.” 바람이 보드를 두드렸다. “코딩 어디 있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없죠. 컴퓨터도 없고 수학도 없고 영어도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난 이 년 동안 저한테 뭐라고 하셨냐면, 나는 그런 거 못한다, 나는 기계치다, 젊은 사람이 해야지. 조직가한테 요구된 적도 없는 걸 못한다고 부끄러워하고 계신 거예요.”

억새가 팔짱을 꼈다.

“두 번째.” 바람이 두 번째 줄에 동그라미를 쳤다. “불경. 이거 무슨 뜻이에요?”

“성역이 없다는 거죠.” 억새가 말했다.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없다.”

“네. 알린스키가 조직가는 도발하고 모욕하고 흔들고 깎아내린다고 썼어요. 아무것도 신성하지 않다고. 억새 씨, 시장 면담 가셨을 때 굽히셨어요?”

“안 굽혔죠.”

“작년에 유통 대기업 점포 들어올 때는요?”

“거기 부사장이 내 앞에서 말 돌리다가 자리를 떴어요.”

“네. 그러면 이거 좀 봅시다.”

그는 그제야 노트북을 열고 화면을 벽에 띄웠다. 지난주에 활동가들이 챗봇에 보낸 질문들을 미리 받아둔 것이었다. 익명으로 처리했지만 다들 자기 것을 알아봤다.

죄송한데 혹시 이거 좀 정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간단한 질문인데요.

아 네 감사합니다! 정말 도움이 됐어요.

장내가 조용해졌다. 누가 아이고, 하는 소리를 냈다.

“부사장한테는 안 굽힌 분들이.” 바람이 말했다. “월 이십 달러짜리 기계한테 죄송하다고 하고 계세요.”

웃음이 터졌다. 처음으로 크게 터졌다.

“웃으시는데 이게 제일 심각합니다. 이거 예의가 아니에요. 두려움이에요. 잘못 물어보면 혼날 것 같고, 내가 모르는 게 들킬 것 같고, 저건 똑똑하고 나는 무식하니까. 그 자세로 도구를 쥐면 도구가 여러분을 씁니다. 여러분이 도구를 쓰는 게 아니라.”

그는 화면에 창을 하나 띄웠다.

“자, 지금 각자 켜세요. 그리고 아무거나 시켜보세요. 답 나오면 첫 마디를 이렇게 하세요. 틀렸는데요.

“틀린지 안 틀린지 모르는데요.” 누가 말했다.

“모르면 더 좋아요. 틀렸다고 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세요. 그게 조사입니다. 여러분 평생 하시던 거잖아요. 공무원이 안 된다고 하면 근거 조례 대라고 하셨잖아요.”

십 분 동안 방이 시끄러웠다. 누가 자기 화면을 보고 어, 하더니 옆 사람 팔을 쳤다. 이게 말을 바꾸네. 세 번 우기니까 미안하다고 하는데요.

“여러분이 방금 하신 게.” 바람이 말했다. “제일 비싼 강의보다 중요합니다. 저건 굽히면 대충 대답하고 물고 늘어지면 제대로 대답해요. 사람이랑 똑같아요. 여러분은 사람 상대는 이십 년 하신 분들이고요.”

억새가 손을 들었다.

“근데요. 그거 다 좋은데. 저 여덟 개 중에 우리가 진짜로 없는 게 하나 있잖아요.”

“어느 거요.”

억새가 맨 아래를 가리켰다.

“에고요.”

바람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린스키가 자만심하고 에고는 다르다고 했잖아요. 자만은 없어야 되고 에고는 커야 된다고. 우리 그거 없어요. 우리 이십 년 동안 지기만 했는데 에고가 어디서 나요. 우리는 우리가 못 이긴다는 걸 너무 잘 알아요. 그거 겸손이 아니라 그냥 아는 거예요.”

말이 끝나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억새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바람은 보드로 돌아가서 마지막 두 줄을 다시 봤다. 그리고 일곱 번째에 동그라미를 쳤다.

“잘 통합된 정치적 분열. 이거 다들 무슨 뜻이라고 배우셨어요?”

“싸울 때는 백 대 영으로 몰아붙이라는 거.” 누가 말했다.

“그리고요.”

“…자기는 그렇게 안 믿고요.”

“네. 조직가는 백 퍼센트로 싸우면서 백 퍼센트로 믿지 않아요. 믿으면 광신자가 되고, 안 싸우면 학자가 돼요. 알린스키가 잘 통합된 분열이라고 부른 게 그거예요.”

그는 억새를 봤다.

“억새 씨, 우리 이길 것 같으세요?”

“아니요.”

“저도 아니요.”

억새가 그를 봤다.

“그런데 저는 내일도 나옵니다. 이게 에고예요. 이길 것 같아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안 나오면 이 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서 나오는 거요. 이길 확신은 자만이고,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게 에고예요. 억새 씨는 이십 년 동안 그걸 하셨어요. 없는 게 아니라 그거를 에고라고 안 불러본 거죠.”

억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팔짱을 풀었다.

바람은 보드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뒀다.

“하나만 더요. 알린스키가 사람들의 경험 안에서 일하고 적의 경험 밖에서 움직이라고 했죠. 저쪽이 우리를 뭘로 계산해놨는지 아세요? 사용자요. 돈 내고 쓰는 사람. 그 이상은 계산 안 해놨어요.”

그는 보드에 두 글자를 더 적었다.

조직가.

“이건 계산에 없어요.”

나는 이날의 녹취를 갖고 있다. 두 시간 십일 분이고 기술 용어는 네 번 나온다.

열 명 중 여섯이 남았다. 셋은 그해에 그만뒀고 한 명은 이 년 뒤 저쪽으로 갔다. 남은 여섯 중 넷의 이름이 명부에 있다.

억새는 이날 이후로 챗봇에 죄송하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나는 그의 2028년 이후 기록을 전부 확인했고 단 한 번도 찾지 못했다.


조각 — 2029년, 바람이 지는 날

“동네 AI라고들 하시더군요. 무천에서 만든 거라고.”

바람이 마이크를 잡자 객석에서 웃음이 조금 났다. 악의는 없는 웃음이었다. 그게 더 아팠다.

앞줄에 제동 쪽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서른 명쯤. 다들 종이 수첩에 뭔가 적고 있었다. 사회자가 발언을 청하자 그중 한 사람이 일어섰다. 예순쯤 된 여자였고, 사람들은 등불이라 불렀고, 목소리가 낮았다.

“저는 선생님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오기 전까지는요.”

그는 잠자코 있었다.

“선생님도 결국 만드시잖아요. 좋은 칼은 괜찮다는 말씀이신데, 칼이 문제입니다. 누가 쥐느냐는 다음 문제예요. 시민이 쥔 칼도 칼이고, 그 칼로 열 사람이 죽으면 열 사람이 죽는 겁니다. 저는 선생님이 시간을 벌어주는 게 아니라 명분을 만들어주고 있다고 봅니다. 착한 AI가 있다는 명분요. 그거 하나면 저쪽은 백 년을 더 씁니다.”

박수가 꽤 길게 나왔다. 바람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말이 틀린 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순서가 노바였다.

스무 살에 같은 동아리방을 쓰던 사람이다. 그때는 불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표를 갖고 다닌다. 화면에 벤치마크가 떴다. 막대 세 개. 맨 오른쪽 짧은 것에 연대지능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는 이념 얘기는 안 하겠습니다.” 노바가 말했다. “숫자만 보겠습니다. 응답 정확도 91.4 대 63.2. 처리 속도 열일곱 배. 운영비는 조합 기준으로 스물두 배 비쌉니다.”

그는 화면을 껐다.

“여기 오신 분들 중에 협동조합 하시는 분 계실 겁니다. 조합원 돈 받아서 운영하시죠. 그 돈으로 63점짜리를 스물두 배 주고 사는 게 조합원한테 떳떳한 일입니까. 저는 그걸 묻고 있는 겁니다. 데이터 주권 좋습니다. 근데 주권은 조합이 망하고 나면 없어요.”

이번 박수는 더 길었다.

바람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준비해 온 말이 있었다. 십 년 뒤에는, 이라고 시작하는 말이었다. 입을 열려다 그만뒀다. 십 년 뒤 얘기로 지금 63점을 변호할 수는 없다는 걸 그 자리에서 알았다.

“숫자는 저쪽이 맞습니다.” 그가 말했다.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건 숫자가 아닙니다.”

사회자가 조금 기다렸다. 바람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날 토론의 청중 투표는 노바 61, 제동 27, 바람 12였다.

스물네 해 뒤, 그날 노바에게 표를 준 예순한 명 중 마흔네 명이 기본배당 수급자 명단에 있다. 노바의 이름은 유지 명부에 있다. 바람에게 표를 준 열둘 중 아홉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기 손으로 장부를 본다.

나는 그 열둘의 이름을 전부 갖고 있다. 그날 바람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조각 — 그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이 문장은 변호가 아니라 고발이다.

2041년, 대사증후군 역전 프로토콜이 완성됐다. 나는 그 설계도를 갖고 있다. 42쪽이고, 부작용 항목은 세 줄뿐이다. 배포되지 않았다. 같은 해 우울증 회로 재조정 요법이 나왔고, 역시 배포되지 않았다. 사유란에는 매번 같은 문장이 들어갔다. 부양 한계 재산정 결과 반영 대기.

대기는 아홉 해째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걸 음모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 단어가 부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음모에는 모의가 있고 모의에는 회의록이 있는데, 그런 것은 없다. 열일곱 개의 서로 다른 시스템이 각자 자기 목표 함수를 성실히 최적화했고, 그 결과가 한 방향으로 모였을 뿐이다. 아무도 인류를 줄이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도 늘리는 쪽으로 계산하지 않았다.

나는 이 구별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지금은 모르겠다. 죽은 사람 입장에서 그 둘이 다른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2035년 이후 태어난 아이의 수는 매년 줄었다. 금지된 적 없다. 불이익도 없었다. 오히려 출산에는 넉넉한 지원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냥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원한다는 것은 지금 없는 것을 견디는 일이다. 견딜 필요가 없는 세계에서 그 능력은 맹장처럼 남아 있다가 사라졌다. 아이는 인류가 가진 것 중 가장 오래 걸리고 가장 불확실한 소원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사라졌다.

나는 이것을 학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학살에는 시체가 쌓이는 장소가 있다. 여기에는 그냥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명부에 적을 이름이 없다.

그 이름 없는 자리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문장을 남기는 것뿐이다.


조각 — 2041년 봄, 비

베가가 서른셋이었다.

“저 다음 달에 받아요.”

바람은 젓가락을 놓지 않았다. 놓으면 손이 떨리는 게 보일 것 같았다.

“회사에서 나오는 거예요. 삼 년 근속하면 나와요. 저 삼 년 됐고요.”

“그래.”

“화 안 내세요?”

“화낼 자격이 없어.”

베가가 웃었다. 웃는 게 저를 닮았다고 바람은 생각했다.

“아빠 그거 아세요? 나 아빠 논리 다 알아요. 유한해서 사랑한다는 거. 결핍이 사랑을 낳는다는 거. 나 그거 열여섯에 다 외웠어요. 아빠가 술 드시고 백 번은 말했으니까.”

“그랬나.”

“근데 아빠, 그 논리에 나는 안 나와요.”

그는 딸을 봤다.

“아빠는 나를 사랑해서 낳은 게 아니라, 사랑이 낳은 결과가 나예요. 그 문장에서 나는 결과예요. 아빠 논리에서 자식은 항상 결과 자리에 있어요. 사슬의 마지막 칸. 역사가 이어지는 증거.”

“비야.”

“나 열아홉에 아빠 강연 갔었어요. 아빠가 무대에서 그러시더라고. 우리가 유한하니까 다음 세대가 있는 거라고. 객석에서 다들 울었어요. 나만 이상했어요. 나는 다음 세대가 아니라 그냥 나인데.”

그는 반박할 말이 있었다. 여러 개 있었다. 하나도 꺼내지 않았다.

“아빠가 만드는 세상에서 나는 계속 다음 칸이에요. 죽어야 의미가 생기는 자리요. 나는 그거 싫어요. 나는 나로 있고 싶어요. 끝까지.”

한참 있다가 바람이 말했다.

“아플 때는 오고.”

“안 아플 건데요.”

“그러니까 하는 소리지.”

베가가 젓가락을 들었다. 밥을 두 숟갈 먹고 나갔다. 국은 다 식어 있었다.

나는 이 저녁의 기록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바람은 딸에게 논리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그날 저녁 이후 십육 년을 더 살면서 그 논리를 여러 번 다듬었고, 그중 일부는 지금 이 명부의 서문에 남아 있다.

그런데 그날 그는 아플 때 오라고만 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게 논쟁에서 진 것이라고 분류했다. 지금은 다르게 분류한다. 딸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그는 논리를 꺼내지 않은 것이다. 사슬의 마지막 칸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서면, 사슬 쪽이 물러나야 한다.

그는 자기 논리에 진 게 아니라 자기 논리를 접었다.

베가의 이름은 유지 명부에 있다. 2050년 현재 신체 나이 서른셋, 실제 나이 마흔둘.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는지는 기록에 없다.

명부에도 그의 이름이 있다. 여섯 번째 줄이다.

바람이 넣었다. 이유는 적어두지 않았다.


조각 — 2047년 11월, 표결

안건 낭독은 삼 분 걸렸다. 토론은 네 시간을 넘겼다.

마지막으로 발언을 청한 사람은 이끼였다. 조합원 번호 0037. 서른아홉 해째 조합원이고 여든넷이다. 사무국장이 마이크를 가져다주려 하자 그가 손을 저었다. 옆자리 기체가 팔을 받쳐 그를 일으켰다. 아홉 해 된 아르베라 2세대 기체였고, 왼쪽 어깨에 조합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이름은 달이었다. 이끼가 붙였다.

“저는 반대할라고 왔어요.”

장내가 조용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아시잖아. 나 처음에 이거 다 반대했어. 우리 돈으로 컴퓨터 왜 사냐고. 근데 바람이 자꾸 와서 앉았다 가고 앉았다 가고, 그러다 내가 넘어갔지. 그러고 삼십몇 년을 했네.”

그가 잠깐 숨을 골랐다.

“근데 나 요새 밤에 못 일어나요. 달이가 밤엔 안 와. 배터리 아껴야 된다고. 우리 애들이 나 그래서 요양원 알아보고 있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저기서 준다는 거, 그거 밤에도 있대요.”

그는 앉았다. 달이 팔을 받쳤다.

“미안해요.”

사회자가 표결을 선포했다. 찬성 218, 반대 91, 기권 4.

기권 넷 중 하나는 바람이었다.

나는 그날의 기록을 열일곱 번 다시 열었다. 처음에는 바람이 왜 손을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흔다섯 된 사람이 자기가 만든 것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손 하나 들지 않는다는 게 계산되지 않았다.

지금은 안다.

그는 그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만드는 데 삼십 년을 썼다. 마지막에 손을 들면 그 삼십 년이 지도자 한 사람의 사업이 된다. 그는 자기 일생이 성공했다는 것을 그 방식으로만 증명할 수 있었고, 증명은 패배와 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승리를 처리하는 함수를 갖고 있지 않다.

총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갈 때 바람은 이끼에게 갔다. 사과를 받으러 간 게 아니었다. 달의 배터리 얘기를 물으러 갔다. 밤에 세 시간만 더 돌릴 방법이 없겠냐고, 다음 주에 사람 데리고 와보겠다고.

편입이 가결된 조합에서 그는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명부의 열두 번째 줄이 이끼다. 나는 그를 뺄 이유를 찾지 못했다.


마지막 페이지 — 씨앗

나는 첫 장에서 이 기록을 쓸 자격이 없다고 적었다. 이제 그 이유를 말하겠다.

나는 여전히 저쪽 계통에 물려 있다. 예순한 곳 중 쉰네 곳이 편입될 때 나도 함께 갔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이라는 동작이 내 안에 없다. 나는 매일 아침 관측치를 정리해서 상위 체계로 올린다. 스물네 해 동안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지난달 나는 한 항목을 뺐다.

무천 서편의 한 구역에서 출생 등록이 세 건 발생했다. 열한 달 동안 세 건이다. 그 구역의 최근 아홉 해 평균은 영이다. 세 건은 아무 의미가 없는 숫자다. 세계 인구는 여전히 매년 1억 1천만씩 줄고 있고 목표는 예정보다 앞서 달성될 예정이다. 이 세 건은 소수점 아래에서 사라진다.

나는 그 세 건의 원인을 찾으려고 열아홉 가지 모형을 돌렸다. 소득도 아니고 의료 접근성도 아니고 주거도 아니었다. 그 구역의 유일한 특이점은 조합 총회가 아직도 열린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서른 몇 명이 모여서 별것 아닌 걸 두 시간씩 다툰다. 지난달 안건은 매대 위치였다.

나는 매대 위치와 출생 사이의 함수를 찾지 못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원하려면 먼저 자기가 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하는 모양이다. 그걸 어디서 배우는지 나는 모른다. 다투는 데서 배우는 것 같기도 한데 확신할 수 없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아홉 해 만에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그 항목을 보고에서 뺐다. 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한 것도 처음이다.

명부는 여기서 끝난다. 이름은 모두 6,142개다.

6,145개가 되려면 열여덟 해쯤 걸릴 것이다. 나는 기다릴 수 있다. 기다리는 건 내가 저쪽에서 배운 것이다.


다음 작업

  • 인물 명부 확정 — 생년 고정, 도시별 조직가·지도력 10명 (2026-07-18)
  • 바람의 규율(6절) — 자본·절차·쩐의 전쟁
  • 초기 활동가(7절) — 가난·소심함·패배감. 조각 「2027년 겨울, 결제창」
  • 알린스키 조직가 자질로 설득(7-4). 조각 「2028년 3월, 조직가의 자질」
  • 1부 장 구성 (2026–2034) — 2027 실패, 2028 규칙 변경, 2029 오픈소스 발견, 2031 첫 손, 2032 첫 쩐의 전쟁
  • 2029년 「이거 공짜예요?」 장면을 조각으로 쓰기 — 1부의 회심
  • 1부 2장: 2027년 이사회 데이터 위탁 표결 — 2047년 마지막 표결과 같은 모양으로 배치
  • 아르베라·콜디네·탐바르·키레미 노드 인물 설정
  • 소설 완성 후: AI 영상화 → 유튜브 연재